손가락 끝이 늘 검게 물들었던 박 로제(Doc. Roger Marcel) 신부님
지난 1978년 3월 19일자의 「공소사목」을 보다가 저릿한 감동으로 다가온 글을 만났습니다. <축하합니다>란에 다인본당의 주보 ‘하나가’가 지령 300호를 맞았다는 축하의 글이었습니다. 글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다인본당(주임 박 로제 신부님) 주보 ‘하나가’가 지령 300호를 맞았습니다. 마음 다해 축하와 감사를 드립니다. 외국인 신부님으로서 한 주일도 빠짐없이 원고, 편집, 삽화, 필경, 등사, 발송 등 모두를 손수 해 오셨다는 사실을 안다면, 누구나 그 정성과 열심에 탄복하지 않은 수 없을 것입니다. 일꾼 부재의 시골본당과 외국인 신부님의 끈질긴 열성! 너무나 대조적인 시골본당의 현실입니다. 한 외국인 사제의 뜨거운 집념은 온갖 장애를 극복하리라 믿습니다. ‘하나가’의 알찬 발전을 위해 손을 모읍니다.”
혼자 고심하며 얇은 기름종이 위에 철 펜을 긋고 등사판을 미는 성실하고 우직스러운 외국 신부님을 쉽게 떠올리게 됩니다. 어떤 사랑의 힘이 낯선 이국의 시골본당에서 이리도 성실한 삶을 묵묵히 살아내게 하는 것일까요? 교구청 자료실에서 발견한 1970년대 다인본당의 주보 ‘하나가’는 너무나 정겨웠습니다. 두 세 번의 철필 선으로 다듬어진 정성스런 그림과 말풍선, 첫영성체를 한 어린이들에게 “모두 다 집에 돌아가서 착한 사람이 되도록 더욱 더 노력할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라는 당부를 적은 글 등 약간 삐뚤 하지만 빼곡히 정성스럽게 박혀있는 글씨는 박 신부님이 신자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고자 하는 마음이 가득 담겨있습니다.
박 신부님은 1927년 프랑스 마른에서 태어나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와 함께 농부로 사시다가 늦은 나이에 신학교를 가셨습니다. 1958년 신품을 받고 그해 바로 한국으로 건너와 1960년 안동 본당 보좌와 1962년 예천본당, 1967년 청송 본당, 1972년 다인본당 주임신부를 거쳐 1979년 봉화 본당 주임으로 계시다가 1983년 상주에서 개회되는 신앙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신자들을 인솔하고 가던 도중 갑자기 선종하셨습니다.
예천본당에 계실 때 박 신부님은 검은 수염을 기르시고 검소한 생활에 자상한 성격으로 전교에 혼신을 다하셨다 합니다. 공소에 다닐 때는 수단을 입고 미사 짐을 손수 짊어지고 필히 걸어 다녔으며 사순시기에는 꿇어 앉아 식사를 하셨다 합니다. 직접 성당 밭에 감자 농사를 지어 양식에 보탰고 연탄을 손수 운반하시는 등 근면함이 몸에 배여 있었습니다. 청송본당에서도 근면 검소를 실천하며 특히 어린이들의 전교에 많은 관심을 가지셨답니다. 눌인공소를 갈 때면 도평까지 버스를 이용하고 눌인동까지 먼 거리를 백고무신 차림으로 항상 걸어 다니며 절약한 차비로 미사 때 쓸 초를 마련하였다고 합니다.
이후 다인 본당에서 7년 4개월을 사목할 때 종이 한 장이라도 함부로 낭비하면 누구든 막론하고 꾸중을 하시고 심지어 우편물 띠지를 뒤집어 재사용 하는 등 70년대 농촌본당의 궁핍을 검소함으로 감당해 내셨습니다. 그 당시 ‘가리방’이라는 수동식 등사기로 직접 쓴 원고를 등사기로 밀어 위에 언급한 ‘하나가’ 주보를 처음으로 발간하였는데 박 로제 신부님의 손은 등사용 잉크가 묻어 항상 손가락 끝이 검게 물들어 있었답니다.
그 당시 봉화본당에서 청년회를 했던 요한 에우데우스는 미소를 머금고 “어서 오세요”하는 자애로운 신부님의 목소리를 잊을 수 없으며, 객지 생활을 한다고 부모님처럼 자신을 돌보아 준 신부님을 ‘제 가슴에 새겨진 박 로제 신부님’이라고 말합니다. 진보 본당 신자들은 항상 소박하시며 어려운 사람들에게 한 번 더 관심을 주시던 신부님이 무척 그립다고 합니다.
손수 만드신 ‘하나가’ 주보를 보며 로제 신부님의 우직한 사랑을 기억하며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안동교구 50년사 편찬위 간사 박효진 유리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