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교구장 두봉 주교의 약력과 희망(포부)” (2)
1969년 5월 29일 안동 감목대리구는 대구교구에서 분리 독립하여 안동교구로 설정되었고, 7월 25일에는 안동교구 초대 교구장으로 파리 외방전교회 두봉 신부가 임명되어 착좌하였다. 사실 안동교구의 설정과 두봉 신부의 교구장 임명설은 이미 4년 전부터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두봉 주교는 한국교회의 발전을 위해서는 방인(邦人) 신부가 교구장 주교로 임명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거듭하여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이러한 두봉 주교의 주장은 1969년 5월까지도 교황청의 교구장 임명을 일단 거절하였다.
하지만 두봉 주교는 재임명을 받고 계속하여 교황청의 교구장 임명을 더 이상 거절할 수가 없어서 교구장직을 수락하였으며, 수락한 이후에도 두봉 주교는 “이번 재임명을 받고 하느님의 뜻을 거절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수락은 하였으나, 앞으로의 일이 걱정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잘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을 확신합니다.”라고 자신의 심경을 솔직하게 피력하기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두봉 주교는 또 피력하기를 “안동교구는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맡아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파리 외방전교회 회원인 나와 교구민들이 같이 힘을 합쳐 이루어 가는 것이므로 조금도 외부에 대한 도움은 바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라고 교구장으로서의 각오를 의연하게 표현하였다.
특히 두봉 주교는 안동교구의 초대 교구장 주교로서 앞으로 수행해야 할 사목 방침이나 방향에 대해서도 뚜렷한 소신과 포부를 밝히기도 하였다. 두봉 주교는 먼저 사목 방침에 대해 “교구는 신자들이 본당을 이루고, 그 본당들이 모여 이룩되는 것인 만큼, 모든 것은 신자들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사제는 다만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신앙을 키워가고, 교회 운영에 참여할 수 있도록 바탕과 환경을 주는 데 그 책임이 있습니다.”라고 언급함으로써 교구 공동체가 갈수록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어떻게 맡겨진 사명을 수행해 나아가야 할지를 분명하게 제시해 주고 있다. 이것이 신임 교구장으로서 뚜렷하게 밝힌 그의 소신이었다.
두봉 주교는 그의 사명을 “다만 뒤에서 교회발전에 조그마한 몫을 수행하는 것이며, 장차 한국인 지도자들에 대한 발전의 기틀을 마련한 후에, 다시 본연의 직분인 선교사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임명에 대한 자신의 소감을 피력하였다. 이러한 신임 교구장으로서, 또 외국인 교구장으로서 밝힌 짧은 그의 소감은 곧 그의 재임 기간이었던 1969-1990년까지 자신의 사목적인 포부이자 희망이며 동시에 사목적인 밑바탕이었다. 이러한 기본적인 토대 위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안동교구의 교구장직을 성실히 수행해 나아갔다.
안동교구 첫 교구장으로서 두봉 주교는 부산으로 전출이 내정된 신부를 포함해서 당시 각 본당 주임신부를 모두 그대로 유임해 줄 것을 대구교구와 왜관 베네딕도 수도회에 요청하였다. 특별히 두봉 주교는 각 본당 사제들에게 “어느 회 소속 신부이든, 원한다면 안동교구는 적극적으로 환영할 것”이라며 사제가 부족했던 당시 상황에 대해 신생 교구로서 첫발을 내딛는 것에 과감하게 포용의 자세를 견지하였다. 실제로 당시 대구교구 이길준 바오로 신부(다인), 김용길 바오로 신부(의성), 춘천교구 최동오 아타나시오 신부(울진), 왜관 분도회 왕묵도 레지날도 신부(함창), 송만협 요셉 신부(화령), 신걸만 제오르지오 신부(가은) 등이 안동교구에 남아 사목활동을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