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3월 틔움(신대원 요셉 신부)-
안동교구의 관할구역과 성직자 및 신자 수
1969년 안동교구가 설정될 당시, 관할 지역의 총인구는 1백7십7만명이었다. 학교는 안동 상지전문학교와 함창 상지 여자 중고등학교 등 2개교였고, 나환우 정착 마을은 7개소(신애, 죽전, 갱화, 신락, 상신, 성심, 천자원)이고, 본당은 18개(안동, 봉화, 영주, 영덕, 영양, 예천, 청송, 서문동, 남성동, 함창, 화령, 점촌, 가은, 문경, 주평, 의성, 다인, 울진)였으며, 사제가 없는 본당으로는 퇴강본당 1개소가 있었고, 아울러 공소는 175개였다. 그리고 신자 총수는 27,742명이었으며, 성직자 수는 주교 1명, 사제 19면(방인 사제2명, 외국인 사제 17명) 등이었다.
이 같은 수치는 1969년 5월 29일 안동교구가 설정되기 이전의 공식적인 사료(교세 통계표)에 근거한 것이다. 특히 박해 시대 전후의 이른바 "교우촌"을 살펴보면, 안동교구의 역사도 역시 한국천주교회의 태동과 함께 시작하여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026년 현재 안동 교회사 연구소가 발굴한 교우촌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안동(신덕(이덕), 구미, 갈전, 명동), 봉화(우련전, 곧은정, 곰직이, 우구치, 도심), 영양(포산, 갈전), 청손(노래산), 안계(쌍호, 검곡, 만리, 청운), 다인(다래, 산성, 못안, 수산, 광덕), 문경(허리티, 마원, 오숫골, 여우목, 한두리), 가은(먹뱅이, 쌍용, 도탄리, 돗마름, 한실), 주평(신영, 창마을), 화령(수봉, 널기, 가무내, 세거리, 멍애목, 앵무동, 점마, 말구리), 함창(사실, 널배미, 새터, 척동), 예천(동송리, 뒤낫, 새랄, 우리개, 굴미, 야목, 신당), 영주(노좌리, 장수, 순흥), 상주(삼괴정, 부원) 등인데, 더 자세한 것을 알려면 안동 교회사연구소가 펴낸 자료집 4<경상도 북부지역 천주교 전래>라는 책을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안동 교구는 1775년 농은 홍유한 선생이 영주시 단산면 구구리로 이주한 이후 박해 시대를 거치면서 관할지역 안에 크고 작은 수많은 교우촌을 형성하였는데, 이 교우촌은 병인박해(1866-1873)가 끝나고 흥선대원군이 정치에서 물러난 1873년 이후, 점차적으로 산촌에서 저잣거리로 내려와 가정공소(家庭公所)를 이루었고, 이 가정공소들이 자라나서 커다란 공소를 이루었으며, 이 공소들이 모여서 오늘날 본당 공동체로 발전하였다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교세 통계에 따르면, 안동교구의 공소는 인구의 감소와 이농현상에 따라 점차적으로 감소하여 2026년도에는 60여의 공소만이 존속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사실을 말하자면, 비록 교우촌이 모여서 공소를 이루었다고는 하나, 그것 역시 하나의 "작은 교회"였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공소교회가 1969년 교구설정 당시 175개소였던 것이 60여개소로 줄어가는 추세에 놓여있긴 하지만, 반대급부로 18개소였던 본당이 2026년 현재 41개소로 설립되어 있으니, 이러한 변화의 추이는 실로 안동교구 설정 당시와 비교하면 놀라운 사실이라고 할만하다 할 것이다.
1911년 조선 대목구가 경성(서울) 대목구와 대구 대목구로 분할되었는데, 안동교구는 대구 대목구에 속했고, 1969년에 대구 대목구로부터 분리되어 독립교구로 설정되었다. 따라서 안동교구는 두봉 주교를 초대 교구장으로 맞이하였고, 초대 착좌는 바야흐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로써 그동안 상주와 문경지방에서 사목하던 왜관대리구 소속 사제들과 안동, 울진, 의성지방 등지에서 사목하던 사제들은 각기 소속 교구인 원주와 대구로 자리를 이동하였다. 이로써 1970년 중반 이후에는 안동교구 소속 외국인(파리외방)과 방인 사제들로만 사목을 전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