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구 설립 직후인 1969년 6월 1일 안동 지방 가톨릭 노동청년회(JOC)가 창립되어 8개월간 예비 훈련 과정을 마친 7명의 여성회원이 선서를 하였다. 1972년에 찍은 이 사진 속의 남성동 본당 JOC 회원들은 서울 구로공단까지 가서 선교할 만큼 열성적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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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 본당에서 사목하던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나성도 신부는 1972년, 선주들과 달리 고용 노동자로 저임금에 시달리던 어부들을 모아 '해성친목회'라는 이름의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두봉 주교의 승인하에 유럽 은인들의 도움을 청하고 회원들의 출자금을 모아, 어떠한 미신행위도 허락하지 않는 조건으로 1974년 마침내 배를 만들어 축성하고 진수식을 하였다.

1977년 10월 18일 안동 문화회관에 있었던 동부동본당에서 농민, 근로자, 양심수를 위한 기도회를 개최하였다. 이처럼 안동교구는 농민들의 억울한 입장을 대변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 기도회 후에 5명의 사제가 연행되었고, 그 중 둘은 구속되었다. 교구 사제단과 신자들은 두 사제의 석방을 요구하는 미사를 계속 봉헌했고, 이 사건 이후로 안동교구는 전국교회의 농민운동과 인권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게 되었다.

안동교구는 1969년 창립초기 부터 농촌 사목에 관심을 가지고 많은 노력을 해 오다가 1977년 4월 교구 사목국 내 농촌 사목부를 설치하였다. 농촌 사목부에서는 공소 주변 마을 실태조사를 하여 현지 농민 교육을 실시하고, 농촌 지도자 연수회를 개최하였으며 쌀 생산비 조사 활동도 하였다. 농민운동에 대한 필요성과 시대적 소명에 따라 1978년 12월 안동교구 농민회 창립 총회가 열렸다.

1979년 영양군에서 일어난 이른바 오원춘 사건(씨감자 피해보상활동에 앞장섰던 안동 카톨릭농민회 청기분회장이 괴한들에게 납치 폭행당한 사건)이 일어나자 안동교구는 8월 6일 목성동 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과 전국 사제단 신부, 가톨릭농민회 회원, 평신도 등 9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기도회를 개최했고, 김수환 추기경은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가 되기 위해”라는 제목으로 강론했다. 참가자들은 가두시위를 하면서 “구속자 석방”, “농민운동 탄압 중지”, “긴급조치·유신헌법 철폐”, “종교탄압 중지” 등을 요구하는 촛불시위를 전개하고, 안동경찰서 앞에서 연좌시위를 벌였다. 이 사건으로 두봉 주교는 추방의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1981년 경북 북부 지역 농민 교육장 활용 및 교구신자 재교육장을 위한 농민회관 건립하여 지역 농민들의 농촌 문제 연구와 개발 및 농민 운동의 집회와 강연회장으로 사용하였다.

교구설립 이후 자선사업과 교육사업에 많은 관심을 가졌던 두봉 주교는 마리스타 교육수사회를 교구에 초빙하고, 1976년에 마리스타 회관을 마련하여 대학생 기숙사와 마리스타 야간학교를 설립하고 사설 영어 강습소도 시작하였다. 고교 진학을 못하는 불우한 청소년들을 위해서는 조각, 선반, 자동차 정비, 타자, 주산, 부기 등 실기 교육을 시켜 학생들의 사회진출을 도왔다.


두봉 주교는 안동교구 관할지역에 나환자들을 위한 수용 시설들이 많음을 감안하여 한센인 치료와 지원을 위해서도 애를 썼다. 1970년 교구장 사목방침에 따라 한국전쟁 당시 종군 간호장교였던 데레사 캄비아 여사의 협조로 다미안 재단 한국지부를 설립하고, 나환우 정착마을들을 돕는 한편 병원과 부속건물도 만들었다. 한센인들의 입원 및 외래 환자진료, 정착마을 이동 진료를 실시하였고, 특히 외래 피부과 환자를 진료하여 새로운 환자를 조기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였다.